I am flipped, completely!
그릇의 슬럼프 본문
이 블로그에 들어오면 생각나는 노래들이 있다.
이 블로그를 만들고 나의 색을 입혀가는 과정에서 그 당시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해주었고 사랑했기에 배경으로 설정해두었던 노래들.
드뷔시의 달빛. 류이치 사카모토의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프롤로그의 버터플라이, 김예림의 레인.
생각해보면 그 때의 내가 지금보다 뚜렷하지 않았나 싶다.
그건 아닌가. 하지만 시간이 흘러 19년을 산 스무살의 내가 되었다하더라도 나라는 사람이 차곡차곡 쌓여오기만 하진 않지 않았겠나
분명히 시간 속 어느 언저리에 두고 온 게 있겠지
초겨울 쯤 친구를 만나서 했던 얘기처럼, 고등학교에 올라와 점점 날 옥죄어오는 상황과 더불어 열심히 하든 하지 않든 언제나 불편한 마음, 그리고 만난 SNS가 한데 어울려 나를 사색에서 조금 멀리 떨어뜨려놓았었다고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돌아본다.
줄어든 고뇌와 잡념과 사색. 이것들이 내게 마냥 긍부정 중 하나만을 의미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게도 변화가 있었음을 알아차려본다.
이 때의 나는 좋아하고 나의 감수성을 표현할 수 있는 곡들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예를 들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이 블로그의 배경음악들.
생각해보니 내 반경에 위치한 음악이 훨씬 적었기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 때만큼 내게 명확한 인상과 감명을 주는 곡도 지금은 없다.
저 때 발견한 저 곡들은 그 당시 나를 온전히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생각의 흐름대로 글을 쓰다보니 점점 또 들죽날죽한 글이 되어가고 있는데 여튼 내가 요즈음에 느끼는 건 그런거다.
열넷에서 열일곱 즈음의 나는, 한없이 여리고 약하고 모든 것들로부터의 자극에 민감했다.
상처도 많이 받고 그만큼 배로 위로 받고 나의 감성을 구축하고 취향을 찾아가고.
흔히 쓰이는 말을 조금 변형해보자면 스치는 저 실낱같은 바람에도 울고 웃었다는 것이다.
예민한 이런 성정이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많이 끌어온 것 같다.
정말로 그런 것 같다, 그렇다.
여름밤의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슈가의 화양연화. 봄날 늦은 오후의 마룬파이브 슈가.
시험 공부를 마치고 도서관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듣던 김윤아의 걸 톡. 시련을 겪은 주인공마냥 알수없는 결의를 다지곤 했지.
방탄소년단의 포유, 이불킥들 들으면서 가슴 설레어 햇살이 비치는 하굣길을 걷기도 했고 몇 달후에는 그 길에서 네버마인드를 들으며 긴장하기도 했지.
태연의 아이가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눈물이 되기도 하고, 학교나 학원을 오가던 모든 길에서의 순간이 다 나의 영화였다.
허연 시인의 칠월이 찌는 더위에도 칠월을 기다리고 괜시리 설레어 맞이하게 하고,
싸이퍼 속 그들의 독기가 여린 날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하기도 했다.
그 때 접한 모든 것들이 나에겐 너무나도 하나하나 큰 의미로 다가온 세계들이었기에 요즘의 나는 조금 밍숭맹숭하고, 지루하다.
그 때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지금 내 일상은 무언가 부족한, 결여된 상태로 느끼게 된다.
나를 가슴 두근거려 잠 못들게 하는, 통째로 뒤흔들어놓을 그런 무언가를 만나고 싶다.
소년단에게 느끼는 감정도 비슷한 것 같다. 어쩐지 왜인지 나는 그때보다 조금 무뎌졌기에 내 머리를 한 대 치고 가는 듯한 아름다움을 바라고 있고 그 말인 즉슨 동시에 지금 덜 만족하는 상태라는 거지.
아 어쩌면 이게 하나의 슬럼프의 형태일까?
이 우주의 수많은 아름다운 세계들과 자극들을 담기에는 지금 내 그릇이 너무 작은 것 같다.
아 내 그릇의 슬럼프인거다
그 땐 100이면 100 족족 처음 보고 듣는 것들이고 그게 내 작은 그릇에 오롯이 담겼다면
이젠 내 그릇에 맞는 이야기들은 이미 비슷한 게 내 그릇 안에 있는 식상한 거다.
더 넓은 우주의 이야기들로 올라가자니 나는 (바쁘지 않으면서) 바빠 그릇을 키울 수 없어 자연스레 그런 자극들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찾아올 기회를 외면한거지.
(간만의 비유네 하하 전엔 '깨달음'도 참 많았는데.)
그렇담 내가 학식을 더하고 생활의 역량을 더할수록 이젠 더 고차원적이고 심층적인 아름다움의 자극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것들을.
이 세상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종류의 분별없이 많이 느끼고 체화해서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어하는 게 여전히 나의 꿈이고 목표니까,
견문을 넓히는 게 해답인 것 같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얻어야 할 것, 그리고 분명 내가 얻을 것. 이다.
시야를 트고 아름다움을 매순간 마주하자.
그게 행복일거야.
(*견문. 보고들음. 보거나 들어서 깨달아 얻은 지식)
사실 요즘 <일상기술연구소>를 읽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 나는 천천히 가고 있어 잘하고 있어.
새로 산 노트북으로 이 블로그에 들어왔는데 기대했던 내 배경음악들이 나오지 않아서 그 음악들 중 하나인 달빛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옛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의 체취가 가득 묻은 이 블로그의 의미와 과거의 나, 지금의 나를 생각해보며 글을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흘렀네.
한 순간이라도 나를 흔드는 것들은 모두 잊지 않고 기록하고 기억해두자. 모두 소중하니까. 글을 써내려가는 와중에도 많이 생각이 난다.
꿈꾸는 하와이, 아름다움이 나 우리를 구원할 때,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지아펭팡의 고향, 쳇 베이커. 더하기 니체의 말. 봄에 나는 없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외에 하나둘씩 계속해서 떠오르는 내 인생에 들어온 수많은 아름다움들.
모두 모두 소중해
♬드뷔시 달빛
♬ https://www.youtube.com/watch?v=FLX3JAoJ8kQ